생 트로핌 대성당, 로마네스크 예술의 정수가 살아 숨 쉬는 아를의 유산
남프랑스 아를(Arles)의 중심 광장, 리퍼블릭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에 단정히 자리한 생 트로핌 성당(Église Saint-Trophime)은 단순한 종교 건축물을 넘어선, 중세 예술과 신앙의 정수가 집약된 성스러운 공간입니다. 하나의 석조 연대기이며, 로마 이후 천 년의 시간을 새긴 살아 있는 유산으로서 12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건축된 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 걸작은 1981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탁월한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성당의 이름은 아를의 첫 번째 주교로 여겨지는 성 트로피무스(Saint Trophimu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성 트로피무스는 사도 베드로에 의해 갈리아 지역에 파견된 7명의 선교사 중 한 명으로, 3세기경 아를에 기독교를 전파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비록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혼재되어 있지만, 254년경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의 서신에서 아를의 주교 트로피무스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어 그의 실존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후 아를은 남부 프랑스에서 중요한 주교좌 도시로 성장했으며, 대주교들이 이 성당에서 즉위식을 치르면서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위엄을 간직해왔습니다.
5세기 성 스테파노 성당 터 위에 세워진 현재의 건물은 1100년경 건축이 시작되어 1152년 성 트로피무스의 유해가 알리스캄에서 이곳으로 이장되면서 본격적인 순례지로 자리잡았습니다. 특히 이 성당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의 중요한 경유지로서 중세 시대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맞이했던 신성한 장소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서쪽 정면에 조각된 '최후의 심판' 부조입니다. 1180년경 완성된 이 포털은 프랑스 로마네스크 조각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그 입구의 조각만으로도 수많은 건축가들과 예술 애호가들의 심장을 뛰게 합니다. 팀파눔 중앙에는 위엄 있는 그리스도가 영광 속에 앉아 있고, 그 주위로 네 복음사가의 상징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린텔에는 천국으로 향하는 구원받은 자들과 지옥으로 끌려가는 죄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중세인들에게 강력한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포털 양쪽에 줄지은 성인들은 아를의 수호성인인 성 트로피무스와 성 스테파노를 비롯한 사도들과 성인들의 조각상으로, 세세한 표정과 주름까지 새겨진 이 장면은 석조 조각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1178년에는 이곳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아를 왕으로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1365년에는 카를 4세 황제 역시 같은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중세 시대 이 성당이 갖고 있던 정치적, 종교적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내부는 놀라울 정도로 단정하고 고요합니다. 20미터 높이의 웅장한 중앙 신랑과 양쪽의 측랑으로 구성된 내부는 프로방스 로마네스크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숭고한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15세기에 추가된 고딕 양식의 성가대석은 원래의 로마네스크 후진을 대체하면서 건축 양식의 시대적 변천사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요소입니다. 성당 내부에는 4세기 로마 석관을 비롯해 아를 주교들의 유해가 보관된 보물고와 다양한 종교 예술품들이 소장되어 있어 기독교 초기 역사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성당과 연결된 생 트로핌 회랑(Cloître Saint-Trophime)은 아를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 중 하나로, 12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건축된 또 다른 보물입니다. 북쪽과 동쪽 회랑은 순수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남쪽과 서쪽 회랑은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어 건축사의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회랑의 기둥머리에는 부활절 신비와 아를의 수호성인들의 영광을 주제로 한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어, 중세 조각 예술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25년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있으며, 그늘진 아치 아래를 걷는 순간마다 시간이 한 걸음씩 느려지는 듯한 감각을 선사합니다.
이곳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1888년 2월부터 1889년 5월까지 아를에서 머물던 시기에도 존재했던 건축물이었고, 그가 바라본 아를의 빛과 그림자 속에 이 성당의 실루엣도 분명히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반 고흐가 창작한 300여 점의 작품들이 탄생한 이 도시에서, 생 트로핌 성당은 변하지 않는 정신적 좌표 역할을 해왔습니다.
현재 생 트로핌 성당은 1801년 주교좌가 엑상프로방스로 이전된 후 본당 교회로 기능하고 있으며, 1882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소성전(Minor Basilica)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성당은 연중무휴로 개방되어 있어 언제든 방문할 수 있으며, 회랑은 계절에 따라 11월 2일 - 2월 28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3월 1일 - 4월 30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5월 2일 - 9월 30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개방됩니다.
방문 시기에는 4월 - 9월이 특히 좋습니다. 긴 해와 따뜻한 바람이 회랑의 고요함과 어우러져, 단순한 '관람'을 넘어선 정서적 체류를 가능케 합니다. 별도의 가이드 투어 없이도 내부 안내판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회랑은 유료 입장이지만 그 값어치를 충분히 합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순간, 여러분은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중세 순례자들과 같은 경건한 마음으로 돌에 새겨진 영원한 기도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생 트로핌 성당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닌,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는 신앙과 예술의 성소로서 방문객들에게 깊은 영감을 선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