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기 전, 딱 하나만 기억하신다면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서로 다른 시대가 한 풍경 안에 자연스럽게 겹쳐 있는 순간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고대 신전의 기둥 옆으로 중세의 종탑이 솟아 있고, 르네상스 궁전 앞 광장에서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커피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로마의 오래된 포석 길과 피렌체의 좁은 석조 골목, 베네치아의 운하와 토리노의 반듯한 대로가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닌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나라의 역사는 과거가 사라지고 새 시대가 그 자리를 대신한 기록이라기보다, 수많은 시간이 지워지지 않은 채 차곡차곡 포개진 이야기와 닮았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가장 자주 오해하시는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의 후예이니 아주 오래된 나라겠지"라는 생각입니다.
사실은 조금 다릅니다. 로마는 대단히 오래되었지만, 이탈리아라는 통일 국가가 태어난 것은 1861년 3월 17일의 일입니다. 콜로세움이 문을 연 뒤 이 나라가 생기기까지 1,780년이 흘렀고,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보다 겨우 87년 앞설 뿐입니다.
이 한 문장을 품고 걸으시면 이탈리아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왜 피렌체 사람과 나폴리 사람이 서로를 외국인처럼 놀리는지, 왜 도시마다 성벽과 깃발과 수호성인이 제각각인지, 왜 파스타 이름이 20킬로미터마다 바뀌는지 — 그 모든 것이 "오랫동안 서로 다른 나라였기 때문"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설명됩니다.
지금부터 그 갈라진 물줄기들이 어떻게 하나의 강이 되었는지,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하나의 나라가 되기 전, 반도에는 여러 얼굴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반도에는 오랫동안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닌 민족과 도시, 왕국이 공존했습니다. 북부에는 켈트계 부족들이 자리 잡았고, 중부에서는 에트루리아 문명이 번성했습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지하 무덤을 도시처럼 지었고, 벽면에 잔치와 춤과 사냥의 장면을 그렸으며,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은 자기들만의 언어를 남겼습니다. 로마는 이들에게서 아치 구조를 배웠고, 검투 경기의 원형과 종교 의례의 상당 부분도 물려받았습니다. 로마 근교의 체르베테리와 타르퀴니아 네크로폴리스는 지금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남아, 로마 이전의 반도가 결코 미개한 땅이 아니었음을 조용히 증언합니다.
같은 시기 남부는 아예 다른 세계였습니다.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시칠리아와 남부 해안에는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들이 성장했고, 로마인들은 이 지역을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 곧 '대(大)그리스'라 불렀습니다. 아그리젠토의 신전 계곡, 시라쿠사의 극장, 나폴리 인근 파에스툼의 도리스식 기둥은 본토 그리스의 유적보다 보존 상태가 좋은 경우도 많습니다. 시라쿠사에서는 아르키메데스가 태어났고, 도시가 로마군에 함락되던 순간까지 모래 위에 도형을 그리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여행자에게 이 사실이 주는 힌트는 분명합니다. 시칠리아 남부를 '이탈리아의 시골'로만 여기고 다녀오시면 절반만 보게 됩니다. 그곳은 한때 그리스였고, 카르타고였고, 아랍이었고, 노르만이었습니다.
로마 — 작은 언덕 마을에서 지중해의 중심으로
로마 역시 처음부터 거대한 제국은 아니었습니다. 전승에서는 기원전 753년을 건국의 해로 이야기하지만, 이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신화가 결합된 전통적 연대입니다.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8세기 무렵 팔라티노 언덕을 비롯한 여러 언덕에 형성된 정착지가 점차 하나의 도시 공동체로 성장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정치사는 크게 세 단계로 접힙니다. 이 셋만 구분하셔도 로마 유적의 절반은 읽힙니다.
① 왕정 시대
초기 로마는 왕이 다스렸고, 일부 왕은 에트루리아 계통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결국 마지막 왕을 몰아내고 '왕'이라는 단어 자체를 혐오하게 되었습니다.
② 공화정 (기원전 509년경 ~ 기원전 27년)
원로원과 집정관, 호민관이 서로를 견제하는 체제가 50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이 기간에 로마는 주변 세력을 차례로 편입하며 반도를 장악했고, 카르타고와 벌인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을 거쳐 지중해 세계의 중심으로 올라섰습니다. 한니발이 코끼리를 끌고 알프스를 넘은 사건도 이때의 일입니다.
공화정 말기에는 영토가 빠르게 넓어지는 동안 정치적 갈등과 빈부 격차, 군사 지도자들의 권력 다툼이 함께 깊어졌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과 내전을 통해 막대한 권력을 장악했지만 기원전 44년 원로원에서 암살되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가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이었습니다.
③ 제국 (기원전 27년 ~ 서기 476년)
그래서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훨씬 영리하게 처신했습니다. 스스로를 왕이라 부르지 않고 '프린켑스(제1시민)'라 칭하며, 공화정의 껍데기를 남긴 채 실권을 모두 가져갔습니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로마 제국의 시대가 열렸고, 그는 훗날 "벽돌의 로마를 물려받아 대리석의 로마를 남겼다"는 말로 기억됩니다.
이후 트라야누스 시대에 제국은 최대 판도에 이르렀고, 하드리아누스는 브리타니아에 성벽을 쌓는 한편 티볼리에 자신만의 우주를 담은 별장 빌라 아드리아나를 지었습니다. 로마에서 하루 정도 나가 볼 만한 유적 가운데 가장 저평가된 곳입니다.
로마가 남긴 것은 건축물만이 아니었습니다.
콜로세움과 판테온 같은 거대한 구조물은 눈에 보이는 유산입니다. 그러나 정작 유럽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꾸어 놓은 것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쪽이었습니다. 도로와 수도교, 도시계획, 법률과 행정제도, 라틴어와 문자 문화가 그것입니다.
제국 전역을 잇던 길과 항구는 사람과 물품만 옮긴 것이 아니라 종교와 사상, 생활방식까지 함께 실어 날랐습니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광장이 생활의 중심이 되고 도로가 오래된 성문을 향해 뻗어 있는 모습에는 로마 도시의 기억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서기 79년, 시간이 멈춘 도시 —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논쟁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 폼페이와 에르콜라노를 삼킨 사건은 이 반도의 역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재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많은 분들이 모르시는 이야기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79년 8월 24일"이라는 날짜는, 사실 확정된 사실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8월 24일설은 목격자였던 소(小) 플리니우스가 30여 년 뒤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의 필사본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2018년 폼페이 제5구역(Regio V) 발굴 과정에서 벽에 목탄으로 휘갈긴 낙서가 발견되었습니다. "XVI K Nov" — 11월 초하루로부터 열엿새 전, 즉 10월 17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목탄은 오래 남지 않는 재료이므로, 발굴단은 이것이 참사 직전에 쓰인 것이며 분화가 가을에 일어났음을 시사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문화부 장관까지 나서서 "역사책을 다시 써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가을 과일이 가지에 매달린 채 발견되었다는 점, 화로가 사용된 흔적이 있다는 점도 늦가을설을 뒷받침했습니다.
다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목탄 낙서가 예상보다 오래 견딘다는 실험 결과와 플리니우스 편지 해석에 대한 재검토가 이어지면서, 폼페이 고고학 공원 측은 다시 8월 24일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즉, 이 논쟁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어느 가이드가 "8월 24일 오후"라고 말하고 다른 가이드가 "사실은 10월이었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두 분 모두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서기 79년이라는 연도는 확정적이고, 정확한 날짜는 여전히 열린 질문입니다. 이 사실 하나를 알고 서 계시면 그 폐허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조금씩 다시 쓰이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기록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476년 이후 — 하나의 중심이 여럿으로 흩어지다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었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로마의 문화와 제도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음 날에도 빵을 구웠고, 동로마제국은 이후로도 오래 존속했으며, 반도 안에서도 로마의 법과 행정, 그리스도교 문화는 여러 형태로 이어졌습니다.
달라진 것은 중심의 개수였습니다. 하나였던 권력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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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트족과 비잔티움제국이 차례로 세력을 잡으며 라벤나를 무대로 삼았습니다. 산 비탈레 성당의 금빛 모자이크는 이탈리아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비(非)이탈리아적인 걸작으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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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족은 6세기 후반 북부를 장악했고, 오늘날 '롬바르디아'라는 지명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북부 도시와 수도원 곳곳에 이들의 자취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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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족이 그 뒤를 이었고, 로마 교황청은 중부 이탈리아에서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을 형성해 갔습니다. 이 교황령 체제는 놀랍게도 1870년까지 존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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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에서는 아랍 세력의 통치와 뒤이은 노르만 왕국이 건축과 생활문화를 겹겹이 쌓았습니다. 특히 팔레르모의 성당과 궁전에서는 라틴 그리스도교, 비잔티움, 이슬람, 노르만 문화가 한 건물 안에서 만나는 놀라운 장면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지역색이 유난히 강한 까닭은 단순한 지방 취향의 차이가 아닙니다. 각 지역이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통과해 왔기 때문입니다.
종탑을 다투던 도시들, 바다를 지배한 공화국들
11세기 이후 중북부에서는 피렌체, 밀라노, 볼로냐 같은 도시들이 자치권을 확대하며 코무네라 불리는 도시 공동체로 성장했습니다. 남부에서는 노르만 세력이 왕국을 세웠고, 베네치아·제노바·피사·아말피와 같은 해양도시는 지중해 무역을 통해 부와 영향력을 넓혀 갔습니다.
베네치아는 갯벌 위에 말뚝을 박아 도시를 세우고 향신료와 비단으로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으로 떠난 것도, 돌아와 감옥에서 견문을 구술한 것도 이 도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제노바는 콜럼버스를 낳았고, 피사는 사탑을 세울 만큼 부유했으며, 아말피는 오늘날 절벽 위 레몬 마을로 기억되지만 한때는 함대를 거느린 해양 강국이었습니다.
오늘날 베네치아의 화려한 궁전과 제노바의 좁고 높은 골목, 피사의 두오모 광장은 아름다운 관광 명소이기 이전에 경쟁과 교역으로 성장한 중세 도시의 기록입니다. 산 지미냐노에 지금도 십수 개의 탑이 남아 있는 이유 역시 간단합니다. 이웃보다 높은 탑을 세우는 일이 곧 권력의 과시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상업과 금융이 발달하고 대학과 길드가 성장하면서 시민문화도 깊어졌습니다. 볼로냐대학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전통 가운데 하나를 형성했고, 피렌체의 상인과 은행가들은 유럽 각지와 거래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단테 알리기에리가 라틴어가 아닌 토스카나계 속어로 《신곡》을 쓴 일입니다. 학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말을 택한 이 선택은, 훗날 이탈리아 문학어가 자라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직 정치적으로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던 반도에서 언어와 문학이 사람들을 느슨하게 이어 주는 문화적 다리가 된 셈입니다.
르네상스 — 몇 개의 도시가 세계의 미감을 바꾸다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피렌체와 베네치아, 밀라노, 로마, 페라라 같은 도시들은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인간의 이성과 감각, 현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예술과 학문 전반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은행업으로 부를 쌓은 메디치 가문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정당화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로렌초 데 메디치('위대한 자')**의 정원은 젊은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배우던 학교였습니다. 페라라의 에스테 궁정과 밀라노의 스포르차 궁정 역시 예술가와 학자들이 모여드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당시 아무도 방법을 알지 못하던 피렌체 두오모의 거대한 돔을 목재 중심틀 없이 쌓아 올렸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와 해부학, 기계 설계와 자연 관찰을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같은 일로 취급했고, 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와 건축을 통해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압도적인 규모로 표현했습니다. 라파엘로는 조화로운 아름다움의 기준을 세웠으며,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권력이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을 도덕에서 분리해 냉정하게 관찰했습니다. 뒤이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과학적 사고의 발전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를 함께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르네상스의 화려함은 정치적 안정과 같은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 반도는 베네치아공화국과 밀라노공국, 피렌체, 교황령, 나폴리왕국 등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도시와 궁정의 경쟁은 예술과 건축을 밀어 올리는 힘이 되었지만, 동시에 외부 세력의 개입을 막기 어려운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이탈리아 르네상스'라 부르는 것은 사실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 밀라노, 페라라, 우르비노 같은 몇 개 점(點)의 이야기입니다. 같은 시기 남부는 다른 왕조의 통치 아래 있었고, 로마는 1527년 신성로마제국군에게 약탈당하는 참사를 겪었습니다.
외세의 시대, 그러나 멈추지 않은 문화
1494년부터 프랑스와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이 이탈리아 전쟁에 뛰어들었고, 1559년 이후에는 스페인의 영향력이 반도의 여러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18세기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왕가가 주요 지역을 나누어 통치했습니다. 반도가 '지리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조롱을 듣던 시절입니다.
그럼에도 문화와 사상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로마와 남부에서는 바로크 예술이 만개했습니다. 베르니니와 보로미니는 건축과 조각을 통해 도시 공간 자체를 거대한 무대처럼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로마의 분수 앞에서 느끼는 극적인 감동은 상당 부분 이 시기의 설계입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밀라노와 나폴리가 중요한 지적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밀라노 출신 사상가 체사레 베카리아는 고문과 사형제도를 비판한 《범죄와 형벌》을 통해 유럽 형법 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치적으로 가장 무력했던 시기에, 오히려 가장 앞선 법사상이 이 땅에서 나왔다는 점은 곱씹어 볼 만합니다.
나폴레옹이 흔들고, 빈 회의가 되돌리지 못한 것
1796년부터 시작된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은 반도의 기존 질서를 크게 흔들었습니다. 프랑스의 지배는 전쟁과 수탈을 동반했지만, 법과 행정제도의 개편, 봉건적 특권의 축소와 같은 변화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1814년 - 1815년의 빈 회의는 옛 왕조를 복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퍼지기 시작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흐름까지 되돌리지는 못했습니다. 서로 다른 왕국과 공국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이탈리아 민족으로 상상하기 시작하면서,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곧 '다시 일어섬'이라 불리는 통일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리소르지멘토 — 네 사람이 각자 다른 길에서 만나다
통일은 어느 한 영웅이 단독으로 완성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성격이 완전히 다른 네 인물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하나의 결과로 수렴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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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마치니 — 이상을 제시한 사람. 통일된 공화국이라는 이상을 내걸고 평생을 망명과 봉기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에게 통일은 '영혼의 사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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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 판을 짠 사람. 사르데냐왕국의 총리로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저울질하며 외교와 근대화를 이끌었고, 북부와 중부를 차례로 확보했습니다. 그에게 통일은 '외교의 사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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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가리발디 — 몸으로 밀어붙인 사람. 1860년 붉은 셔츠의 '천인대 원정'으로 시칠리아에 상륙해 양시칠리아왕국을 무너뜨렸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정복한 남부 전체를 왕에게 넘기고 어떤 자리도 요구하지 않은 채 물러났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이 그를 오래도록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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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왕관을 쓴 사람. 사보이아 왕가의 군주로서 1861년 3월 17일, 통일 이탈리아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상과 외교, 군사 행동과 왕조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합쳐진 결과였습니다.
다만 그때도 지도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베네토는 1866년에 편입되었고, 교황령의 중심이던 로마는 1870년 이탈리아군에게 함락된 뒤 1871년 정식으로 수도가 되었습니다.
수도의 이동 자체가 하나의 역사입니다. 첫 수도는 토리노(1861년 - 1865년)였고, 프랑스와의 합의에 따라 피렌체(1865년 - 1871년)로 옮겨졌다가, 마침내 로마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토리노의 사보이아 왕가 궁전과 로마의 비토리아노 기념관은 고대 유적과는 전혀 다른, 비교적 젊은 근대국가 이탈리아의 기억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등장합니다. 통일 직후 "우리는 이탈리아를 만들었다. 이제 이탈리아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고 널리 전해집니다. 흔히 마시모 다첼리오의 발언으로 인용되지만 실제로 그가 그 문장을 그대로 말했는지에 대해서는 사료상 논쟁이 있으므로, 일화로 받아들이시는 편이 정확합니다.
다만 그 말이 가리킨 현실만큼은 진짜였습니다. 통일 당시 주민 대부분은 표준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각자의 지역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 비율에 대해서는 연구마다 추정이 크게 갈리므로 특정 수치를 단정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순서입니다. 국가가 먼저 생기고, 국민 의식은 나중에 만들어졌습니다.
통일의 기쁨 뒤에 놓인 그늘
정치적 통일이 곧 사회적 통합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북부와 남부의 경제 격차, 제한된 참정권, 농촌의 빈곤과 문맹, 지역별 언어 차이는 새 국가가 풀어야 할 어려운 과제로 남았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찾아 유럽과 아메리카로 떠났습니다. 오늘날 뉴욕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파울루에 이탈리아계 공동체가 두텁게 형성된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같은 시기 정부는 에리트레아와 리비아 등에서 식민지 확장을 추진했습니다.
통일의 기쁨 뒤에는 지역 갈등과 사회적 불평등, 식민주의라는 어두운 역사도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함께 기억하는 것이 이 나라를 온전히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 — 가장 어두웠고, 그래서 가장 깊이 기억하는 시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직후에는 중립을 지켰지만, 1915년 5월 연합국 편으로 참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승전국이 되었으나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혼란을 겪었고, 전후의 실업과 물가 상승, 정치적 폭력과 사회 불안은 자유주의 체제를 뿌리부터 흔들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즘이 세력을 키웠습니다. 1922년 10월 로마 진군 이후 무솔리니는 총리로 임명되었고, 1924년 - 1926년 사이 언론과 정당, 노동조합의 자유가 차례로 억압되면서 독재체제가 굳어졌습니다.
파시스트 정권은 에티오피아를 침략해 식민 지배를 확대했고, 나치 독일과 가까워졌습니다. 1938년에는 유대인을 학교와 공직, 사회생활에서 배제하는 인종법이 시행되었습니다.
1940년 6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잇따른 군사적 실패와 본토 침공 속에서 1943년 7월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졌습니다. 같은 해 9월 연합국과의 휴전이 발표된 뒤에는 더욱 비극적인 분열이 이어졌습니다. 남부에는 국왕과 연합국 측 정부가 자리했고, 독일군이 점령한 중북부에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사회공화국이 세워졌습니다.
그 사이 여러 정치 성향의 시민과 군인들이 레시스텐차(Resistenza), 곧 저항운동에 참여하여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세력에 맞섰습니다. 전쟁과 내전, 점령과 학살이 뒤엉킨 시기였으며 민간인과 이탈리아계 유대인들도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1945년 4월 25일은 나치 점령과 파시스트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여행 중 만나게 되는 'Via 25 Aprile'나 'Piazza della Resistenza' 같은 거리와 광장 이름에도 이 시대의 기억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1946년 6월 2일 — 가장 조용하고도 결정적이었던 하루
이날 국민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군주제와 공화제 가운데 새로운 국가 형태를 선택했습니다. 같은 날 제헌의회 선거가 함께 열렸고, 이탈리아 여성들은 처음으로 전국 단위 정치선거에서 투표하고 후보로 참여했습니다.
개표와 이의 절차를 거쳐 6월 18일 공화국의 탄생이 공식 선포되었습니다. 마지막 국왕 움베르토 2세는 포르투갈로 떠났고, 로마 캄피돌리오 언덕에는 사보이아 왕가의 문장이 빠진 삼색기가 올랐습니다.
제헌의회가 마련한 헌법은 1948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으며, 파시즘과 전쟁의 경험을 딛고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을 새 국가의 토대로 삼았습니다. 오늘날의 국경일 '공화국의 날(Festa della Repubblica)'이 6월 2일인 이유입니다.
재건, 기적, 그리고 흔들림
전후의 재건은 알치데 데 가스페리 정부 아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50년대 - 1960년대의 '경제 기적(il miracolo economico)' 시기에는 농업 중심 사회에서 현대 산업국가로 빠르게 변모했고, 남부에서 북부 공업도시로 대규모 국내 이주가 일어났습니다. 자동차와 가전제품, 패션과 디자인, 영화가 일상과 도시의 표정을 바꾸었습니다. 피아트 500이 거리를 채우고 베스파가 로마의 골목을 달리던, 그리고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가 세계를 사로잡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지역 격차와 사회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는 정치적 극단주의와 테러가 이어진 '납의 시대(anni di piombo)'를 통과했고, 1990년대 초에는 대규모 부패 수사가 전후 정당체제를 뿌리째 뒤흔들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이 정치를 대할 때 보이는 특유의 냉소와 열정이 뒤섞인 태도에는 이 시기의 기억이 겹쳐 있습니다.
전쟁의 상처를 협력으로 바꾸려 한 선택
한편 이 나라는 전쟁의 상처를 유럽 협력으로 극복하려 한 중심 국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창설에 참여했고, 1957년 로마에서 체결된 조약을 통해 유럽경제공동체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이 흐름이 오늘날의 유럽연합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EU라 부르는 공동체의 출발점이 다름 아닌 로마였다는 사실은, 여행 중 한 번쯤 떠올려 볼 만합니다. 유럽 통합은 이탈리아에게 경제적 선택이기 이전에 전쟁과 독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결단이었습니다.
오늘의 이탈리아, 그리고 그 유산을 지키는 방식
1946년에 태어난 민주공화국 이탈리아는 아직 100년이 되지 않은 젊은 나라입니다. 수천 년의 유산을 품었지만, 공화국으로서의 역사는 이제 여든 해를 조금 넘어섰을 뿐입니다.
고대 로마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 아주 오래된 단일국가로 생각하기 쉽지만, 오늘의 이탈리아는 서로 다른 역사와 언어와 기억을 가진 지역들이 19세기에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20세기의 독재와 전쟁을 통과한 뒤 다시 민주주의를 세운 나라입니다.
1978년 6월 23일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을 비준했고, 현재 62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해 세계 최다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문화유산 56건, 자연유산 6건). 첫 등재는 1979년 발카모니카 암각화였으며, 최근에는 사르데냐 선사시대 장례 전통인 '도무스 데 야나스'와 중부 이탈리아의 '콘도미니오 극장' 체계가 새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숫자는 자랑이라기보다 부담에 가깝습니다. 베네치아는 해수면 상승과 관광객 양쪽에 시달리고, 폼페이는 끊임없는 보존 작업을 필요로 하며, 로마는 지하철 한 노선을 뚫을 때마다 유적이 나와 공사가 멈춥니다. 이탈리아가 관광세와 입장 예약제를 꾸준히 확대하는 배경에도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여행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그 무게를 조금 이해하고 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역사를 '보러' 가시는 분들을 위한 실전 안내
배경을 알고 계셔도 현장에서는 헤매기 쉽습니다. 여행 커뮤니티와 현지 안내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시행착오와, 그에 대한 대응을 정리해 드립니다.
자주 겪으시는 시행착오 세 가지
① "로마에서 다 볼 수 있겠지"
가장 흔한 실패입니다. 로마는 고대 로마와 바로크에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르네상스는 피렌체, 중세 해양 문명은 베네치아, 그리스·아랍·노르만은 시칠리아, 비잔티움은 라벤나에 있습니다. 시대를 도시에 배분하지 않으면 로마에서 체력을 다 쓰고 나머지를 흘려보내게 됩니다.
② "하루에 유적 세 곳"
콜로세오·포로 로마노·팔라티노는 통합권으로 묶여 있지만, 셋을 하루에 도는 일정은 체력적으로 무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6월 - 8월 로마의 한낮 유적지에는 그늘이 거의 없습니다. 오전 첫 입장이나 늦은 오후로 나누시는 편을 권해 드립니다.
③ "성당은 무료니까 아무 때나"
주요 성당은 미사 시간에 관람이 제한되고, 일요일 오전에는 대부분 입장이 어렵습니다. 또한 어깨나 무릎이 드러나는 복장은 입장이 거절될 수 있습니다. 한여름에도 얇은 스카프나 가벼운 셔츠를 가방에 넣어 다니시면 낭패를 피하실 수 있습니다.
알아두시면 좋은 실용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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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박물관과 유적지는 매달 첫째 주 일요일 무료 개방이 시행되는 곳이 많습니다. 다만 대상과 운영 방식이 변동되므로 방문 전 각 기관 공식 사이트 확인을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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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오, 우피치, 최후의 만찬(밀라노) 등은 사전 예약이 사실상 필수입니다. 특히 최후의 만찬은 15분 단위 소수 입장이라 몇 주 전에 마감되는 일이 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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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통일 기념일), 4월 25일(해방 기념일), 6월 2일(공화국의 날)에는 기념 행사와 함께 일부 기관이 휴무하거나 특별 개방합니다. 이 날짜에 걸리신다면 불편이 아니라 좋은 기회로 보셔도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묘한 감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2천 년 전 로마인이 밟았던 돌 위를 지나다가, 500년 전 화가가 올려다본 천장을 함께 올려다보고, 80년 전 사람들이 자유를 되찾은 광장에서 젤라토를 들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결국 이 나라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연도와 왕조의 이름을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의 나라 안에 어째서 이토록 다른 도시와 음식, 건축과 말투가 존재하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로마에서는 고대제국과 교황령, 파시즘과 공화국의 흔적이 한 거리 위에 겹쳐집니다. 피렌체에서는 중세 상업도시가 어떻게 르네상스의 무대가 되었는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베네치아의 아름다움 뒤에는 천 년 가까이 이어진 해양공화국의 힘이 있고, 토리노의 우아한 대로에는 사보이아 왕가와 통일운동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시칠리아의 성당과 시장에서는 그리스·로마·아랍·노르만 문화가 서로를 지우지 않은 채 공존합니다.
오래된 돌계단과 광장, 성당과 기차역을 지나며 서로 다른 시대가 남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이탈리아 여행은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시간을 넘어 지금의 이탈리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천천히 발견하는 여정이 됩니다.
이탈리아는 박물관이 아닙니다. 역사가 아직 퇴근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실 여러분의 여행이, 부디 오래 기억되기를 바랍니다.